exodus

Part 1. 아미쉬 마을

Intro

탐방의 주제인 ‘탈출’은 나의 삶에 실용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신속하고 간편한 서비스에 둘러싸인 체 손가락 스와이핑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모든 것이 최적화된 편리함 속에서 나는 늘 탈출이 필요했다. 탈출은 줄곧 바라보는 실상이지만 닿을 수 없는 무지개같아서 언젠가 도달하길 바라는 이데아 같은 것이었습니다. 돌이켜보니 내가 탈출과 유사한 감각을 뚜렷이 느낀 때가 있었다.

2016년 미국 중부에 체류하던 시절, 현지에서 만난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친구를 포함한 총 13명의 자녀와 부모가 한집에 살고 있었는데, 거실에는 벙커 침대가 여러 대 펼쳐져 있고 각자의 식판에 저녁을 배식받아 먹는 풍경은 가정집보다는 무료 급식소에 더 가까워 보였다. 예상한 바와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친구의 가족은 종교적 신념으로 인해 피임을 거부하고, 자기 이름 앞의 통장을 가지지 않으며, 그때그때 필요한 돈을 벌어 살아가는 가톨릭의 한 교파에 속한 가정이었다. 자본주의에 영합하는 가치와 정반대를 지향하며 살아도 행복한 그들의 삶의 형태는 생산성에 최적화되어 있는 일산신도시의 아파트에서 불안한 안락함을 느끼던 본인에게 모종의 해방감을 선사했다.

나는 이 8년전 기억을 단서 삼아, 일시적으로나마 탈출을 경험하기 위한 탐방을 떠나기로 했다.

제약의 자유

아미쉬에 떠나기 전, 2월은 바쁘게 허덕이며 준비했던 프로젝트들을 끝마치고 모처럼 생긴 여유를 맞이했을 때였다. 바빠서 정신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다 끝나면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만 있을 거라 여기저기 선언하고 다녔으나 막상 아무것도 안하는 상황을 맞닥들이니 광활한 시간을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바쁘게 흘러가는 삶이 주는 고자극 속에 익숙해진 것이었을까? 그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오롯이 나 자신과 시간만 존재는 상황이 낯설고 불안했다. 나는 나를 외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튜브 쇼츠를 계속해서 새로고침했다. 유튜브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잘 흘렀으나, 이상한 자괴감에 곧잘 휩싸이며 괴로워 했다.

‘유튜브 쇼츠’를 비롯한, 기술 매체는 나에게 과다 섭취하는 진통제와 같은 감각으로 다가온다. 즉각적으로 상황을 마비시켜주는 친절함이 있지만 더부룩한 과식을 한 상태와 같다. 더부룩하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지만 또 다시 무언가를 먹는 두려운 폭식증 같은 것이기도 하다.

가끔은 교도소에 무기징역으로 갇히는 상상을 한다. 범죄에 대한 상상은 아니고, 평생을 어딘가에 갇힌 운명에 처한 나를 상상한다. 모든 것을 한 눈에 보고 확인할 수 있고 실시간으로 상태를 알 수 있는 무한한 업데이트의 가능성의 상태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서의 감금이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상태가 지겹고 피로할 때, 나는 가끔 독방에 갇히고 싶다. 그 안에서 나는 탈출을 실현할 수 있을까?

아미쉬 트립을 다녀온 뒤 돌이켜 생각해보니 전기, 통신, 교통 등의 기술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그들은 현대 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제약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러한 제약덕분에 자유로운 사람이기도 하다. 아미쉬는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이 두렵지 않은,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나는 아미쉬 마을에 그들이 누리는 자유—탈출— 을 경험하러 갔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아무것도 안하는 상태에 도달하기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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