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년 정도 보스턴에서 머무르고 있었던 나는 5개월이 되었을 즈음 한국에 대한 생각을 끊임없이 했다. 예전에 파리에서 반년 넘게 지냈던 시기가 있었지만, 그때와 다르게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곱씹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해련씨가 미국을 온다는 소식에 내심 기뻤던 것 같다. 외국에서 지내게 되면 한국 사회의 축소판을 만나기 때문에 종종 더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지만, 동시에 한국에서 내가 몸담고 있었던 그룹이 그리워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모쪼록 해련씨로 인해서 알게 된 아미쉬(Amish) 마을은 자본주의의 정점이라 볼 수 있는 미국에서 있었다. 몇몇 해외 유튜버들이 그곳에 방문해서 영상을 찍었고, 아미쉬와 관련된 프로그램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 사이에서 그러한 것이 꽤 오래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에서 매우 신기해보이기도 했다.
출발 전에 자본주의를 만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보스턴 백베이 던킨 도너츠에서 를 사먹었다. 보통 사이즈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의 벤티 사이즈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4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면서 첫 뉴욕행이기도 해서 많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느껴졌다.
늘 엄마가 노는 놈이 날 가리나라는 말을 하곤 하셨는데, 그렇다고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비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을 보았는데, 그걸 많이 떠올렸던 것 같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상하게 비행기 안에서만 로맨틱 영화를 엄청 본다. 시야 좁아질 때가 역시 로맨스를 찾기 좋은 시기인 듯 하다.) 뉴욕에서 세세한 계획은 없었지만, 우선 근처에서 학교를 다니는 친구를 함께 만나기로 했다. 나는 사실 몇몇의 건축물을 봐야 한다는 사명감에 휩싸여 있었는데, 학교에서 도판으로 보았던 것을 실물로 보고 싶은 이유가 컸던 것 같다. 그래서 가장 먼저 갔던 곳인 토마스 헤더윅 과 이었다.
한국 미술인을 오랜만에 만난 나는 원래 내향인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래서 오전에는 뉴욕에서 유학 중인 한 조각 작가를 만났다. 대학을 다닌 시기가 겹치기는 하지만 따로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DM을 보내서 연락을 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뉴욕 생활기와 학교 생활을 듣는 것은 꽤 재미있었다. 많은 미술 전시와 이벤트 사이에서 심심할 틈이 없게 느껴졌다. 보스턴에서 심심함에 휩싸였던 나로서는 좀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오전의 짧은 커피 타임이 마무리된 다음, 우리는 자본주의의 정점 혹은 뉴욕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타임스퀘어를 보러 가기로 하였다. , 모두 주변에 마천루이다보니 해련씨의 고개는 반쯤 위를 향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웠던 것은 타임스퀘어 중간에 설치된 이었는데, 사람들이 위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보면서 쉴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그럼 여기서 무엇을 보는지가 중요할 법하다. 하지만 맞은편에는 낮에도 엄청난 빛을 내보이는 전광판과 고층빌딩만 있었을 뿐이었다. 흔히 이런 구조가 바다나 숲 등의 풍경과 함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꽤 흥미로웠다. 사람들이 많은 타임스퀘어를 피해 맨하튼 곳곳을 걸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를 보기도 하였다. 아미쉬들이 자동차가 아닌 마차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을 인터넷에서 보았는데, 마천루 사이 도로 위를 지나는 말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뉴욕 맨하튼은 일찍이 램 쿨하스(Rem Koolhas)가 방문해서 1978년에 『정신착란증의 뉴욕(Delirious New York)』를 쓴 도시로 나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과 거의 균일한 의 모습은 내가 그곳에 방문하기 전에 가지고 있는 인상이다. 그리고 한 반세기 정도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 개발의 측면은 너무나 뚜렷하게 느껴지고 있어서 흥미로웠다.
뉴욕에 도착한 이래로 나는 다시 반쯤 미디어에 잠식되어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뉴욕의 풍경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집에 가는 길에 문구를 보고 뜨끔하였다. (한국에 돌아와서 알게 되었는데, 이것은 Snap chat 의 광고 문구였다.)
해련씨는 나보다 새로운 기술 소식을 더 빨리 찾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미국에 오기 전 줌 미팅에서 애플 비전 프로(Apple Vision Pro)를 체험해보고 싶다고 했다. 당시 한국에는 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침 애플스토어에 물어보니 현장에서 예약을 할 수 있다고 하여서 예약을 하였다. 체험을 하게 되었고, 나는 구경을 하면서 뒷사람의 표정이 조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뒤이어 내가 프로 비전을 썼을 때도 비슷하게
‘입이 떡 벌어지는’이라는 관용어에 걸맞는 표정이었다. 전체적으로 사용법을 가르쳐주는 방식이었는데, 손으로 잡고 당기는 등의 제스쳐가 중심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큰 관건은 HMD가 너무 무겁다는 점이었다. 꽤 깔끔한 디자인과 작동법이었지만, 기계 하드웨어의 무게때문에 자꾸 흘러내려서 코가 낮아지는 기분이었다. 나중에 살펴보니 붉은색으로 광대 쪽에 자국이 남아 있었다. 신기술의 무게는 나에게 조금 버거운 듯 하다.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이 마침 나의 애플비전 프로를 쓴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저녁으로 뉴욕의 수제버거가 먹고싶었던 나는 해련씨를 데리고 구글에서 찾은 음식점을 갔다. 미국이 으레 그러하듯이 외식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다음날부터 뉴욕을 떠난다고 하니 수제버거의 맛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물론 금액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숙소에서 나온 이후 우리는 바로 Moynihan Train Hall at Penn Station으로 갔다. 배가 고파서 근처에서 이탈리아 피자집을 들렸는데, 을 보면서 이민자의 나라인 미국에 대해서 체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참고로 여기서 무화과 피자를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던 우리는 기차역에서 좀 더 시간을 보내기로 했었다. 다만 이 기차역은 이상하리만치 의자가 없었는데, 워낙 미국의 노숙자 문제가 많아서 그런가 했다. 하지만 둘러보다 보니 역사 안에 이곳 외에는 한국처럼 대기하는 의자가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바닥에 앉아있었다. 일종의 유료 휴게장소에서 우리는 의자에도 앉을 수 있었고, 핸드폰도 충전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의 여정이 끝난 이후, 뉴욕의 역에 비하면 작은 크기였지만, 랭캐스터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게시판도 있었다. 우리가 갈 숙소는 역에서 좀 더 거리가 있었기 떄문에 바로 우버를 부르기로 했다. 택시를 기다리는 와중에 역
1박을 할 호텔에 도착하였다. 하늘을 보기 어려웠던 뉴욕과 다르게 여기에서는 이 호텔에서 숙소를 하루 묵은 이후에는 아미쉬분이 운영하는 홈스테이에 가기로 했다. 말하자면 호텔에 묵는 오늘까지는 관광객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을 만끽할겸 내일 올 생일을 기념해서 텍사스 로드하우스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사실 프렌차이즈로 유명한 집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때 처음 가게 되었다. , 이것이 미국 스타일의 음식인가 싶었다. 아미쉬에 대한 리서치를 하던 중에 한동안 북미에서 아미쉬를 대상으로 한 리얼리티쇼 Breaking Amish 혹은 Amish in the City가 있었는데, 자본과 기술과 멀어져서 살아왔던 아미쉬가 미국의 도시 문화를 경험하는 내용이었다. 사실상 나 역시도 그 연장선에서 미국 프렌차이즈 음식점을 경험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심지어 생일이라고 이야기하니 작은 조랑말 모형 위에 앉아서 축하를 해주었다. 쑥스러움은 내 몫이었다.
부끄러움을 뒤로 한 채 근처에 할인 매장(Ross)이 있어서 알뜰함을 챙기기 위해서 불쑥 들렸다. 그 곳에서 저렴한 물품을 구매하는 아미쉬들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다들 비슷한 모자를 쓰고 유사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해련씨는 이들이 마차를 타고 왔을지 매우 궁금해 했다. .
생일인 오늘은 아미쉬 투어를 하기로 하였다. 마치 테마 파크처럼 꾸며 놓은 환경은 아미쉬의 버스 투어 중에도 아미쉬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사진을 사람에게 찍으면 안된다는 식의 주의점을 알려주었는데, 그 와중에 버스 앞에 아미쉬의 종교적인 이유가 크겠지만, 대부분 규격화되어 제작되는 듯 하였다. 아미쉬는 생각보다 매우 관광 산업이 활성화 되어 있었어서, 비가 오는 날이었지만 관광객이 꽤 많았다. 해외에서 온 관광객도 심심찮게 보였다. 관광 버스를 타고 정해진 휴게소에 들려서 물건을 사고 여행을 하는 방식은 중간에 보이는 는 정확하게 자전거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마치 킥보드처럼 밟고 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아미쉬 테마파크를 돌아보면 그들이 과거부터 지속했던 여러 생활들이 보이는 듯 했다. 흥미로운 점은 가내수공업으로 필요한 활동 외에도 종종 나 가구와 같이 외부에 판매하는 물품들을 제작하는 경우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모쪼록 이러한 테마파크식 구조는 아미쉬를 심도있게 파악한다기보다는 대략적으로 요약본을 본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나, 특히나 기념품샵에서 확인할 수 있는 엄청난 종류의 은 자꾸 무엇인가 사게 하려 하였다.
점심도 아미쉬 버전으로 먹어보기로 하였다. 근방에 있는 Katie's Kitchen (Authentic Amish Cooking)에서 매장에는 실제로 아미쉬들이 근무를 하고 있었고, 이렇게 밀접하게 관광객들과 만나고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를 제외한 관광객들은 차를 타고 온 듯하였기에, 관광지의 느낌이 더 드러났다.
이후 우리는 우버를 타고 아미쉬가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숙소에 갔다. 도착을 하고나서 보니 아미쉬 식사도 판매한다는 문구가 있어서 다음 날 도전해보기로 하였다. 아미쉬 숙소는 실제 아미쉬의 생활에 가깝다기보다는 건물과 비품들은 대체로 오래되긴 했지만 깔끔했다. 그들이 주로 만드는 뜨게질 물품들을 볼 수 있기도 했다. 아미쉬의 인상이 세상과 매우 단절된 듯한 수도승의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실제로 관광 산업과 같이 밀접하게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러한 자본주의적 관광 산업이 이들의 생활을 유지시켜나가고 이해시키는데 발판이 되는 듯 하기도 하였다. 기술 문명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그것의 흐름에서 어떻게 벗어날지 살펴보는 시간이었지만, 자꾸만 우리는 핸드폰으로 테이블에 있었던 아미쉬 퍼즐은 아미쉬들의 대표적인 요소를 볼 수 있어서 매우 교육적이었다.
생일이 지나서 그런가 날씨가 흐렸다. 해련씨는 사실 뉴욕 첫날에 폭우의 날씨 때문인지 감기에 걸려 점차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었다. 근처에 아미쉬 마켓이 있어서 빗속을 뚫고 가보았다. 마켓을 홍보하기 위해서 여기는 전광판을 사용하지 않고, 이러한 펫말을 활용하였다. 생필품을 파는 마켓에서 나는 보스턴에서 먹을 생각으로 버터와 소금을 구매했다. 금액이 저렴해서 좋았다.
조금 쉬는 시간을 가진 후 우리는 또 다른 사실 놀랍게도 아미쉬 관련 투어는 이 랭케스터 지역 대부분에서 매우 다양하게 있었다. 전화를 해서 예약하고 버기 체험을 하거나, 관련 프로그램들이 많았다. 오히려 너무나 촘촘하게 관광 산업이 구조화되어 있어서 즉흥적으로 누군가를 만나서 인터뷰하는 것 등의 활동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아미쉬와 관련된 가장 기술적인 공간인
아미쉬와 관련한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었고, 교회 의자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다채널 영상 투사를 통해서 신기술을 표방하고 있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만든 이후 사람들이 관람하는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판타즈마고리아와 같은 효과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요 줄거리는 아미쉬의 청년이 아미쉬 종교를 거부하고 외부로 나가기를 선택한 뒤, 다시 돌아오는 교육적인 흐름이었다. 이 영화가 끝나고 나서 해설사분들이 들어와서 설명을 진행한다. 버기와 차량이 충돌하는 사고는 비일비재하고, 실제로 외부 생활을 하다가 아미쉬로 돌아오는 이들도 많다는 등의 정보를 알려주신다. 흥미롭게도 해설사분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도든 아미쉬와 관련된 삶을 이어왔고, 그들을 존중하고 있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의 역사가 담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산업 자체의 구조가 인상깊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투어에서는 이전과 동일하게 테마파크처럼 모형을 보고 해설사분이 설명을 하는 방식이었다. 이전 공간과 다르게 이번에는 가정집과 학교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중간중간 전기를 사용하는 기계들이 등장하였는데, 예를 들면 전등같은 것이었다. 특히나 그래서
재미있는 점은 이들이 모든 기술과 문명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정기적으로 회의를 거쳐서 어떠한 기술을 받아들일지 정한다는 점이다. 여러 기술들을 놓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논의를 한 이후에 기술이 배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기술의 발전을 종교 혹은 나아가 인간이 제어한다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저녁은 숙소에서 주문을 해서 받았다. 그 집의 딸이 배달을 해주어서 마치 하숙생의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수제 레모네이드까지 받았는데, 개인적으로 정말 아직까지 남는다. 만족스러운 식사와 함께 해련씨는 기념품샵에서 샀던 『전기 없이 살아가기』 책을 읽었다. 다행히 이 숙소는 전기가 들어오는 숙소였는데, 해련씨의 이야기로는 몇몇 숙소는 정말 아미쉬의 방식에 맞춰서 와이파이나 전기가 안들어오는 곳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조금 어려울 듯했다. 기술을 받아들이는데에도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기술을 버리는 데에도 나는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에어비엔비인 만큼 해련씨는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에어비앤비 어플에서는 관리자가 따로 있기 때문에 중간에 전화교환원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미쉬 가족들은 직접적으로 숙소 이용객에게 예약 관련 연락을 받지는 않았다.
기술 탈출을 외치면서 사실 개인적으로는 핸드폰도 며칠 간 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강박적인 사진 촬영과 연락은 핸드폰을 안하는 것을 사실상 실패에 가깝게 만들었다. 심지어 나는 예전에 핸드폰 사진 촬영을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 사진 소리가 나지 않는 미국폰을 한국에서 구매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핸드폰이 없을 때의 심심함을 견디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아서 애시당초에 피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숙소를 체크아웃하면서 우리는 계속 꾸준히 전기를 사용했고, 핸드폰을 보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요 며칠간은 그 행동이 얼마나 많이 이루어지는지 체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직접적으로 아미쉬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기에, 우리는 또 다른 아미쉬 투어를 진행했다. 이 투어에서는 소소한 물품들도 함께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를테면 종교적으로 우상숭배에 해당되기 때문에 모든 인형은 얼굴이 없었는데, 미국 여자아이들에게 필수품일 수도 있는 바비 인형이 함께 떠올랐다.
이곳의 투어 가이드 역시 아미쉬와 장기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고, 그부분에서 자신의 이 는 아미쉬 자체가 농경 산업을 대부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동물들이 함께 구성되어 있었다. 그렇다보니 주변에는 관광을 하러 온 가족 단위의 사람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심지어 한국어가 들려오기도 하였다. 다른 곳과 비슷하게 아미쉬 생활과 관련있는 , 철공소, 마차 보관소 등이 재현되어 있었고,
이 아미쉬들은 그 기원을 쫓아가보면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독일, 스위스, 알사스 지역에 있던 이들이 미국 펜실베니아주로 이주를 하면서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 학습 실제로는 독일어 방언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상깊었던 점 중에 하나는 모든 아미쉬 투어에서 마지막 동선은 기념품 매장이라는 점이다. 피클, 수공예품, 퀼트 등 관련한 기념품을 실제로 판매하고 있었고, 거기에서 수입을 얻는 듯하였다. 자연스러운 이 동선은 사실 자본주의형 관광 산업에 걸맞는 것이었는데, 동시에 이 자본주의적 구조가 그들이 지속적으로 기술과 거리를 두고(정확하게는 천천히 받아들이고) 그들의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들은 예를 들어 다른 지역의 아미쉬를 만나는 등의 목적으로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아미쉬 전용 택시를 이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숙소를 운영하는 아미쉬와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받은 아미쉬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숙소와 레스토랑이라는 구조는 그들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친분을 쌓고 정보를 얻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런점에서는 아쉬움이 조금 남지만, 이렇게 탐구의 관점으로 그들에게 정보를 얻는다는 생각이 오히려 그들이 공동체에 스크레치를 주는 듯 생각되어 많이 조심스러워 졌다.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기차역에서 32가를 올라가는 에스컬레이더에서 그리고 누군가가 More Love, More Social Media 라고 적은 것을 발견했다. 우연하게도 수미상관이 맞춰지고 있었다. “Less Social Media” 문구를 보면서 랭커스터에서는 인스타그램과 핸드폰에서 며칠이라도 벗어나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꽤나 인상깊은 경험을 한 이후에 해련씨는 아침 비행기로 한국으로 떠났다.
다음날 뉴욕에서 몇 년 만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유니언스퀘어에서 큰 마켓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각 지역에서 올라와서 식료품에서 물품을 팔고 있었는데, 매주 크게 열린다고 친구가 설명을 해주었다. 이 마켓들을 보면서 나는 “아미쉬”의 개념과 그 공동체 혹은 사회가 유지되는 흐름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는 기술과 자본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커지고 줄어든다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그런 연관 관계는 단순하다는 생각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아이러니함은 우리는 랭커스터에서 이동을 하기 위해서 계속 우버를 불렀다는 점이다. 그 자본주의 플랫폼이 없었다면 아미쉬 마을에 도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현 시점에서 기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매우 큰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본주의가 역으로 아미쉬 마을에서는 관광 산업이라는 형태로 그들의 공동체를 계속 유지하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그렇다면 관건은 기술을 얼마나 받아들일까와 같은 의식일 것이다.